과학기술정책연구원 혁신성장정책연구본부장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혁신성장정책연구본부장

농업 가치사슬은 농업후방, 농업생산, 농업전방의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농업 후방산업은 5대 투입재인 종자, 농약, 비료, 농기계, 농자재를 생산하여 농업생산을 지원하는 영역이고, 농업 전방산업은 농업에서 생산된 원료를 가공하여 식품, 화장품, 의약품 등을 생산하는 영역이다. 농업생산은 1차 산업인 반면에 농업 전후방산업은 2차 산업인 제조업의 성격이 짙다.

흥미로운 것은 연구개발의 관점에서 농업과 전후방산업의 특성을 비교해 보면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농업은 연구개발 투자의 35∼70% 가량이 새로운 제품과 기술의 개발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성과 품질 수준을 유지하는데 사용되는데, 이는 농업전후방을 포함한 제조업과 매우 다른 특성이다. 유기물인 농작물은 기후를 비롯한 환경변화에 매우 민감하여 이에  지속적으로 대응하는 연구개발이 동반되지 않으면 생산성과 품질이 크게 하락한다.

만약 건국 이래 최대 연구개발 성과인 통일벼를 지금 우리 국토에 심는다면, 70년대 후반의 생산성과 품질에 크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큰데 이는 그 당시의 자연환경 일체가 지금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장 활동인 제조업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한 영향이 크지 않아서 연구개발 투자의 거의 전부가 생산성과 품질, 기능향상에 활용될 수 있다.

둘째는 농업은 칼몸에 해당하는 베이스라인(Base line) 연구개발이 칼날에 해당하는 커팅엣지(Cutting Edge) 연구개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자의 예를 들면 유전체 단위의 분자육종은 매우 유용하고 새로운 커팅엣지 영역인 한편, 지역별로 종자 및 재배기술을 확립하는 지역적응성 시험과 전통육종 역시 반드시 필요한 베이스라인 영역의 연구개발이다. 식품의 예를 들면 발효, 가공, 저장, 영양 등 지금 이순간 식품공장에서 필요한 수율, 안전성, 생산성, 품질을 유지 하는데 필요한 연구개발 활동이 베이스라인 연구개발이고, 대체육, 배양육, 요리로봇 등 미래에 각광이 예상되는 첨단 영역은 커팅엣지 연구개발이다.

반도체, 자동차와 같은 제조업의 경우 커팅엣지 연구개발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겠지만, 자연환경과 교감하는 유기물로 구성된 농식품은 어제와 동일한 수준의 품질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베이스라인 연구개발이 매우 큰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농식품 분야 연구개발 투자의 우선순위와 크기를 결정할 때는 베이스라인 연구개발과 커팅엣지 연구개발의 최적 배분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특히 국민의 건강과 영양을 고려한 국가 농식품산업의 안정적 연구인력 공급 관점에서는 베이스라인 연구개발이 커팅엣지 연구개발 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이다. 베이스라인 연구개발을 소홀히 하고 커팅엣지 연구개발에만 집중한다면, 정작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우수 연구인력은 줄어들고 국가 농식품 공급망은 위태로워져서 결과적으로 커팅엣지 연구개발에서 나온 성과를 접목할 뿌리조차 사라지게 된다. 결국 커팅엣지 연구개발만 고집하다 보면, 칼몸은 없고 칼날만 있어서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연구개발의 관점에서 보면 칼날에 해당하는 최첨단 신기술만을 지향할 분야가 있고, 칼몸에 해당하는 기본기술과의 균형을 고려해야 하는 분야가 있다. 반도체, 자동차, 농기계 등의 무기물 중심 제조업이 전자의 영역이라면, 유기물 중심의 농식품산업은 후자의 영역이다. 문제는 국가 연구개발 투자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런 산업적 특성이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첨단, 유행, 신기술, 미래의 이름으로 칼몸은 제쳐두고 칼날만 만드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데, 농식품 분야의 바른 연구생태계를 위해서는 이에 대한 합당한 대응논리 개발과 적극적 방어주장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칼날은 칼몸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날카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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