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적작(敵地敵作)과 위기의 화훼산업
적지적작(敵地敵作)과 위기의 화훼산업
  • 관리자
  • 승인 2019.05.2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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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량 칼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혁신성장정책연구본부장
이주량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혁신성장정책연구본부장 

농업의 기본은 적지적작이다. 적지적작이란 말 그대로 가정 적합한 곳에서 가장 적합한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적지적작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인데 자연환경적 조건과 사회경제적 조건이다. 재배 적지가 되려면 대상 작물과 기후, 풍토, 강우 등의 자연환경적 궁합은 물론이고 인건비, 소비자 기호, 시장 접근성 등 사회경제적 궁합도 충족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FTA 확산으로 농산물의 국경이동이 쉬워진 현대농업에서는 적지에서 사회경제적 조건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고, 적지의 이동도 빈번해 지고 있다. 

적지적작의 기본 원칙을 가장 잘 실천한 사례는 네덜란드의 화훼산업이다. 1980년대까지의 네덜란드는 화훼에 아주 적합한 위치, 즉 적지였다. 지정학적으로 북해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서 20도 안팎의 연교차와 선선한 기후로 화훼의 연중생산에 유리했고, 기후학적으로도 냉해, 열해, 자연재해, 병충해 등에서 안정생산이 가능했다. 자국인 인건비도 지금처럼 높지 않았고, 저렴한 외국인 노동자도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 유럽 특유의 꽃 소비문화로 인근에 탄탄한 시장이 있었으며, 로테르담 항구를 중심으로 하는 훌륭한 국제 물류망도 갖추고 있었다. 간척지 투자로 세운 고비용 온실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화훼는 매우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적지의 조건이 빠르게 악화되어 갔다. 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 전역의 인건비가 가파르게 올랐고, 수출 물류비도 빠르게 상승했다. 한국과 일본 등 후발국들의 화훼기술이 발전하면서 네덜란드 화훼와의 가격격차도 좁혀지기 시작했다. 위기에 직면한 네덜란드 화훼조합은 자국 내 생산 효율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자국영토를 적지로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해외생산으로 눈을 돌렸고, 아프리카와 남미를 새로운 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남미 콜롬비아에서 생산된 네덜란드 꽃은 북미시장으로 직수출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생산된 네덜란드 꽃은 유럽으로 수출된다. 네덜란드 화훼산업의 생산과 물류는 해외현지에서 발생하지만 수익과 상류는 네덜란드 본토로 향하고, 본토의 R&D는 다시 네덜란드를 화훼강국으로 만드는 새로운 글로벌 적지적작 모델이 만들어 진 것이다.우리나라 화훼산업도 네덜란드와 유사한 발전경로를 지나고 있다. 1990년대 농업부문 신성장동력으로 각광받았던 한국의 화훼산업은 2005년을 기점으로 농가수, 재배면적, 생산액이 절반수준으로 하락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주목할 것은 지금의 어려움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 위기이며, 한국도 화훼산업에서 더 이상 적지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해결방법은 한국의 화훼산업도 네덜란드가 했던 것처럼 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글로벌 화훼산업의 중심은 자연조건이 뛰어난 적도 부근의 고산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해외에서의 화훼생산을 강화하면 국내에서 생산된 화훼제품과 수출시장에서 경합하여 국내에 피해를 입힌다는 논리는 지극히 자기방어적 주장이다. 네덜란드의 화훼산업, 한국의 자동차 산업, 반도체 산업 등 소위 잘 나가는 산업들은 글로벌 적지에서 생산하고 글로벌 시장으로 수출한다. 핵심은 자국내 생산 여부가 아니라 상류, 부가가치, 고수익이 본토를 향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위기의 한국 화훼산업도 하루빨리 글로벌 적지를 향해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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